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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Make The Plant≫ 

소멸의 소중함 - 글 : 조 연 주

 

  살아가다 “사실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200년 후에는 모두가 죽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하고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자 행하는 모든 일들이 실은 소멸을 향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결론은 우리의 고개를 맥없이 떨구게 만든다. 살면서 쏟는 크고 작은 노력들의 성과가 우리는 항상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것은 영속적이지 않다. 내가 위대한 문학 작품을 완성하여 그 책이 지금부터 앞으로 수천 년간 계속 읽히더라도, 결국 어느 날 태양계는 식을 것이고 우주는 서서히 멈추거나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순간이 오면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노력의 흔적은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불멸성’을 전혀 바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이는 물에 녹아 사라지고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홍지희 작가의 작품이 지닌 속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작가 홍지희는 이번 ≪We Make The Plant≫ 전에서 관객이 직접 플라스틱 재질의 종이를 돌돌 말아 대지로 치환된 소금 더미에 꽂도록 유도하였다. 작고 가벼운 플라스틱 풀 형상은 따라서 누구나 제작 가능하며 어느 곳이나 이동 가능하다. 더불어 물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소금의 특성에 의해 작품이 지니는 부동(不動)의 본질은 희석된다. 불멸할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진다. 플라스틱 종이를 말아 만들어진 고깔은 그것의 빈 공간을 온전히 드러내 보인 채 소금에 박힌다. 텅 빈 고깔의 속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고스란히 담는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空間)은 도리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된 곳으로 변모한다. 이 가능성은 곧 고깔이 작가의 발길을 따라 새로운 장소에 놓임으로써 마주하게 될 또 다른 환경을 뜻하기도 한다. 소금 언덕에 플라스틱 고깔을 꽂는 행위는 무언가를 한 지점에 고정시킨다는 지점에서 언뜻 작가가 추구하는 ‘유동성’과 반대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시가 끝나면 주변으로 흩어져 제설 작업에 쓰이게 될, 결국은 녹아 없어질 운명인 소금은 변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작품’ 그 자체로서의 일반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있다. 우리는 홍지희 작가의 작품을 통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텅 빈 것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과 등을 맞대고 있으며 작품의 부동성(不動性)은 절대적인 것이 결코 아님을 깨닫게 된다.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홍길동 다녀감’, 혹은 ‘철수, 영희 우리 사랑 영원히’와 같은 문구를 새겨놓는 행위는 그 장소를 방문했음을 오랫동안 남기기 위함이거나 함께 온 사람과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출이다. 홍지희 작가가 만든 소금 산에 고깔 식물을 꽂는 것 역시 일종의 흔적을 아로새기는 작업이다. 누군가 내가 심어둔 고깔을 일부러 옮기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작품의 한 부분으로써 고깔이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작품의 완성에 참여한 관객들은 작가의 유도를 따라 고깔의 모습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작품의 불멸성은 짧은 전시 기간을 끝으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우리가 심었던 고깔은 원래의 소금 대지를 잃고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환경을 맞이할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홍지희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에 스스로 처하도록 하여 우리를 궁극적인 소멸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영원을 기원하는 소멸, 이 얼마나 모순적인 조합인가!

     

  결국은 사라져버릴 소금 산은 언젠가 스러질 우리 삶의 축약이다. 뜨거운 태양 빛에 의해 바닷물이 마르고 이윽고 소금이라는 결정체가 생겨나듯 타는 생의 갈증을 견디고 사는 우리들은 인생의 결정(潔淨)을 알알이 쌓아 올린 ‘삶’이라는 언덕을 짓는다. 인생의 대부분은 수없이 많은 성공과 실패, 그리고 갈망과 실망과 같은 이러 저러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알갱이만을 유심히 바라보다 조금 시선을 멀리 두고 소금 산 전체를, 그리고 결국은 흩어 없어질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생의 기간 동안 한번 쯤 해봄직한 “200년이 지나면 나는 죽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생을 보다 넓은 맥락에 놓고 볼 수 있게 하는 사유의 논리와 꼭 닮아있다. 전반적인 작업 과정의 귀결인 소멸과 이에 따른 일련의 허무주의와 같은 느낌은 이처럼 우리에게 소멸의 의미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하는 힘이 있다.

     

  모든 것은 어쩌면 결국 플라스틱의 무게만큼 가벼운 것이며, 모든 갈증과 짠 물기를 담은 응어리들이 한데 모여 산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미에는 결국 눈 녹듯 사라질 소금처럼 형체 없는 것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소금 산에 고깔 식물을 꽂아 심듯, 인생에 있어서 ‘나의 의지’로 ‘나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어린 시절 군인 아버지를 둔 탓에 겪어야만 했던 잦은 이사는 홍 작가로 하여금 집이란 장소를 어느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게끔 하였다. 우리가 세상의 풍파에서 유일하게 쉴 수 있으며, 언제나 ‘그 곳’에 있을 것이라 여기는 집 마저 결국은 소멸과 생성의 과정을 쉼 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다, 결국은 사라져버릴 모든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과연 나는 어디 즈음에 생의 흔적을 남겨야 할까. 작품 소멸의 문턱에서 삶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하는 홍지희 작가의 작업이 새삼 고마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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